광개토왕릉비를 변조하였다”는 폭탄선언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문 변조설의 내용
1880년 가을, 일본 육군 참모본부는 포병 중위 사쿠오에게 스파이 임무를 맡겨 중국에 파견하였다. 그는 북경에서 중국어를 배운 뒤 신분을 감추고 만주일대를 누비다가, 1883년 4~7월경 광
기록 문헌 – 용비어천가(1445)
『中有古城 諺稱大金皇帝城 城北七里有碑 宇其北有石陵二』
평안도 강계부 서쪽에 강을 건너 140리에 너른 평야가 있다.
그 가운데 옛 성이 있는데, 세간에는 금나라 황제의 성이라고 한다.
성의 북쪽 7리 떨어진 곳에 비가 있고, 또 그 북쪽에 돌로 만
변조설이 제기된 이후에는 위의 판독문 자체를 부정하여 해석을 유보하거나 새로운 판독에 입각한 해석도 시도되고 있다.
이진희는 ‘래도해파來渡海破’의 넉 자가 일본의 참모본부에 의해 조작된 글자이므로 기존 해석은 모두 타당치 않으며, 글자의 판독이 원상으로 복구되기 전에는 이를 해석할
Ⅰ 서론.
최근 일본의 독도가 자신이 땅이라 우기기에 반대하여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광고를 하는 등 여전히 독도를 둘러싸고 분쟁은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역사 왜곡은 비단 독도 문제 한 가지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자국의 치부를 가리기 위한 ‘종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고대 한반
광개토왕릉비는 높이는 6.39m이며, 무게로 따진다면 약 37t이나 된다. 능비의 모양을 보면 불규칙한 長方形기둥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윗면과 아랫면은 약간 넓고 허리 부분은 약간 좁은 편이다. 그리고 이 비의 4면에 당시 유행하던 연서체로 1,775자 ( 동남 1면 11행 449자, 서남향 2면 10행 387자, 서북향 3면
광개토대왕비는 너무나도 중요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그동안 우리는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신라인에 의해 쓰여진 삼국사기를 토대로 연구를 해왔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은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기에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 시대에 직접 고구려인에 의해 쓰여진 기록이다. 게
광개토왕릉비는 고구려 고도 국내성(國內城), 현재는 행정구역상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위치하고 있는 거석비로, 고구려의 발전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계기를 열어놓은 광개토왕(제위 391~412, 39세)의 공훈을 찬양하여 세운 기념비이다. 능비는 몸돌(碑身)과 받침돌(臺石)로
부의 합성어이다. 임나는 광개토왕비, 삼국사기의 강수전, 진경대사탑비, 한원, 통전(通典)등 한국과 중국의 문헌에서도 확인된 것처럼 가야지역을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이란 국호는 7세기 이후에나 확인되는 것으로 임나일본부의 문제가 거론되는 6세기 중엽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광개토왕이 순시차 평양성에 갔더니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대왕에게 고하기를 “왜인이 우리 국경에 가득히 들어와서 城池를 파괴하고 있으니 구원을 요청한다.”는 내용이다. 신라를 구원하기 위한 마치 종주국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정한다는 것이다. 이엉 영락 10년인 400년에 5만의 대